법화림 | 2장 부처님의 생애_4 출가와 고행
법화림

 

 

 

 

 

 

  4. 출가와 고행

 

 

  1) 출가의 결심

 

  출가한 사문을 만나고 성으로 돌아온 태자의 소식을 전해들은 숫도다나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태자의 출가를 염려한 것이다. 과연 태자는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부왕에게 청했다. 부왕은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태자의 출가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늦은 밤에 홀로 궁전을 거닐던 태자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라훌라가 태어났구나. 속박을 낳았구나."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홀가분하게 출가하려던 자신에게 자식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출가를 막는 속박이요 방해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출생은 오히려 태자의 출가를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큰 애착이 생겨나기 전에 오래전부터 해온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출가하기로 결심한 날, 태자는 잠에 빠져 있는 야소다라와 아들을 멀리서 본 뒤 시종이자 마부인 찬나의 방으로 향하였다. "일어나라, 찬나야. 깐타까에게 안장을 얹어라. 갈 곳이 있다."

  태자는 성을 넘어갔다. 그리고 찬나를 돌려보낸 뒤, 가지고 있던 칼로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완벽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싯닷타 태자의 출가 이야기는 태자의 출가가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생사의 근본 고뇌와 번민을 해결하기 위한 결단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왕위도 버리고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 야소다라와 아들 라훌라마저 뒤로 한 채 늙고 죽어가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길로 나아간 이때는, 싯닷타 태자가 29세 되던 해였다.

 

 

  2) 스승을 찾아서

  싯닷타 태자 당시 인도의 주류 종교는 바라문교였다. 인도 사회 최상위 계급인 바라문들은 태초에 브라흐만이라는 신이 있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해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고, 우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브라흐만 신을 찬양하는 의식을 집전하고 제사를 올리며 최고의 권력을 부여받는 자격은 바라문 계급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상을 부정하며 나타난 혁신적인 종교 수행자들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슈라마나, 즉 사문(沙門)이라고 한다. 그들은 바라문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집을 떠나서 걸식 생활을 하며 수행하였다. 이들은 당시 새로운 도시 국가들의 왕족, 귀족, 부호의 정치적, 경제적 원조 아래 활동하고 있었다.

  수행자가 된 싯닷타는 이러한 사상가들이 대거 몰려 있는 바이샬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행주의자였던 박가와를 만났고, 당대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가 그들이 가장 궁극의 경지라고 이야기하는 높은 선정의 단계를 체험하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소식은 얻지 못했다. 선정에 들었을 때는 번민도 괴로움도 사라지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여전히 욕심과 어리석음의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갔다. 싯닷타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음을 느끼고 그들을 떠났다.

 

 

  3) 6년간의 치열한 고행

 

  이제 싯닷타는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걸어갔던 고행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가야의 고행림(苦行林)으로 가서 실로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의 치열한 고행을 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궁극적 진리를 얻기 위해 육체를 압박했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도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 끼, 사흘에 한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닷타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곧 죽을 것이다"라고.

 

『불소행찬(佛所行讚)』

 

 

  싯닷타의 고행은 6년이나 이어졌다. 그의 길고도 혹독한 고행은 그를 죽음 직전의 상태로까지 몰아갔다. 당시 출가 사문이나 종교인들 모두는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세계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행자라면 누구나 고행을 했고, 사람들은 치열하게 고행하는 수행자들을 존경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싯닷타는 고행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된다. 고행은 육체를 극단적으로 학대하기만 할 뿐이었다. 극도로 피폐해진 육체는 정신의 피폐를 가져왔고 그 상태에서 맞게되는 궁극의 경지는 결코 진실하고 진정한 열반이라고 할 수 없었다.

  싯닷타는 고행을 포기했다. 그것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풍조에서 고행의 포기는 '타락한 사문'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중요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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